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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노키 무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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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노키 무네코는 레이겐 천황의 측실로, 히가시야마 천황의 생모이다. 1674년 텐지로 임명되었으나 처음에는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이후 히가시야마 천황을 낳아 정식으로 텐지에 임명되었다. 히가시야마 천황 즉위 후 준삼후가 되었으며, 레이겐 상황의 신임을 받아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699년 동생 옹립 시도설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1711년 출가하여 1732년 사망했다. 현재의 일본 황실과 구황족 11궁가의 공통 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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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카쓰카사 후사코는 에도 시대 레이겐 천황의 뇨고로 입궁하여 중궁에 책립된 황후로, 준삼후를 거쳐 여원 칭호를 받았으며 막부로부터 소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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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노키 무네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명마쓰노키 무네코
원어 이름松木 宗子
로마자 표기Matsunoki Muneko
작위레이겐 천황의 텐지
작위 2히가시야마 천황의 생모
별호케이호몬인 (敬法門院)
생애
출생일메이레키 3년 12월 30일 (1658년 2월 2일)
사망일교호 17년 8월 30일 (1732년 10월 18일)
향년76세
매장지쇼죠켄인 (교토부 교토시 카미쿄구)
가족 관계
배우자레이겐 천황
자녀히가시야마 천황
후쿠코 내친왕
에이슈 여왕
쿄고쿠노미야 아야히토 친왕
황녀 (우메노미야)
카츠코 내친왕
황자 (세이노미야)
아버지마츠노키 무네조
어머니카와하타 히데코
기타 정보
칭호경법문원 (敬法門院)
신위텐지, 준삼궁, 여원
혈연 관계레이겐 천황전시, 동산 천황 생모

2. 생애

레이겐 천황은 많은 궁녀들과 관계를 맺어 황자와 황녀를 얻었지만, 에도 막부가 기대했던 정비 다카쓰카사 후사코에게서는 황자가 태어나지 않아 후사코와 다른 궁녀들 간의 경쟁이 치열했다.[1]

1674년 5월, 레이겐 천황은 마쓰노키 무네코를 독단적으로 새로운 텐지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임명은 무가 덴소나 긴리 부속에 알려지지 않아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처음에는 "오이와"라는 가칭으로 불렸다. 무네코는 천황의 총애를 받아 이듬해 1675년 9월에 히가시야마 천황이 되는 황자를 낳았다.[2]

1681년, 레이겐 천황은 황위 계승 방침을 정하고, 11월 9일에 무네코를 정식 텐지로 임명하여 "다이나곤텐지"라고 불렀다.[3] 히가시야마 천황 즉위 후인 1689년에 준삼후가 되었다.[4] 레이겐 상황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에 관여하였고, 에도 막부가 레이겐 상황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려 한 후에도 레이겐 상황은 무네코와 그의 부모인 마쓰노키 무네조 부부를 통해 조정에 관여하려 하였다.[4]

겐로쿠 7년에는 시미즈다니 사네나리 등이 무네코의 노여움을 사 경질되었고, 겐로쿠 10년에는 아리스가와노미야 유키히토 친왕의 왕녀 유키코 여왕을 입내시켰다. 겐로쿠 11년에는 자신이 낳은 후쿠코 내친왕과 후시미노미야 쿠니나가 친왕의 혼인을 실현시켰다. 이러한 행동은 레이겐 상황의 의향에만 따른 것은 아니었으며, 교토쇼시다이와 회담을 갖는 등 독자적인 요소도 있었다. 막부는 무네코를 친막부파로 끌어들여 레이겐 상황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다.[5]

그러나 겐로쿠 12년 5월, 무네코가 히가시야마 천황을 배제하고 동생인 쿄고쿠노미야 아야히토 친왕을 옹립하려 한다는 풍설이 돌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저하되었다. 히가시야마 천황이나 코노에 모토히로가 에도 막부에 무네코의 전횡을 호소하며 영향력 배제를 요구했을 것으로 보인다.[7]

나카미카도 스케히로 실각 후 정치적 발언력이 저하되고, 히가시야마 상황과 쿄고쿠노미야가 잇따라 병사하면서 정신적 타격을 받은 마쓰노키 무네코는 쇼토쿠 원년 10월 17일(1711년 11월 26일)에 센도고쇼를 떠나 55세의 나이로 출가했다.[8] 조정에서는 12월 23일(1712년 1월 19일)에 여원으로 삼았으나, 출가 후 법호인 케이호인(敬法院)을 그대로 여원호로 사용하는 등, 이전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8]

교호 17년 (1732년) 8월 30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 카미쿄구 쇼죠켄인에 있다.

2. 1. 텐지 시절

레이겐 천황은 많은 궁녀들과 관계를 맺어 황자와 황녀를 얻었지만, 에도 막부가 기대했던 정비 다카쓰카사 후사코에게서는 황자가 태어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후사코와 다른 궁녀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졌다.[1]

1674년 5월, 레이겐 천황은 마쓰노키 무네코를 독단적으로 새로운 텐지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임명은 무가 덴소나 긴리 부속에 알려지지 않아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처음에는 "오이와"라는 가칭으로 불렸다. 무네코는 천황의 총애를 받아 이듬해 1675년 9월에 히가시야마 천황이 되는 황자를 낳았다.[2]

1681년, 레이겐 천황은 황위 계승 방침을 정하고, 11월 9일에 무네코를 정식 텐지로 임명하여 "다이나곤텐지"라고 불렀다.[3]

2. 2. 히가시야마 천황의 생모

레이겐 천황1674년 5월, 마쓰노키 무네코를 독단적으로 새로운 텐지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는 부케텐소나 킨리즈키에게 통보되지 않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처음에는 "오이와(おいは(おいわ))"라는 가칭으로 불렸다.[2] 무네코는 천황의 총애를 받아 이듬해 9월에 히가시야마 천황이 되는 황자를 낳았다.[2] 1681년, 레이겐 천황은 황위 계승자를 히가시야마 천황으로 정하고, 무네코는 정식으로 텐지에 임명되어 "다이나곤텐지"로 불리게 되었다.[3]

히가시야마 천황 즉위 후인 1689년에 무네코는 준삼후가 되었다.[4] 레이겐 상황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에 관여하였고, 에도 막부가 레이겐 상황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려 한 후에도 레이겐 상황은 무네코와 그의 부모인 마츠노키 무네조 부부를 통해 조정에 관여하려 하였다.[4]

겐로쿠 7년에는 시미즈다니 사네나리 등이 무네코의 노여움을 사 경질되었고, 겐로쿠 10년에는 아리스가와노미야 유키히토 친왕의 왕녀 유키코 여왕을 입내시켰다. 겐로쿠 11년에는 자신이 낳은 후쿠코 내친왕과 후시미노미야 쿠니나가 친왕의 혼인을 실현시켰다. 이러한 행동은 레이겐 상황의 의향에만 따른 것은 아니었으며, 교토쇼시다이와 회담을 갖는 등 독자적인 요소도 있었다. 막부는 무네코를 친막부파로 끌어들여 레이겐 상황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다.[5]

그러나 겐로쿠 12년 5월, 무네코가 히가시야마 천황을 배제하고 동생인 쿄고쿠노미야 아야히토 친왕을 옹립하려 한다는 풍설이 돌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저하되었다. 히가시야마 천황이나 코노에 모토히로가 에도 막부에 무네코의 전횡을 호소하며 영향력 배제를 요구했을 것으로 보인다.[7]

2. 3. 정치적 영향력 행사와 몰락

레이겐 상황의 신임을 받던 마쓰노키 무네코는 조정을 통해 정치에 관여하려 했다.[4] 그러나 에도 막부는 레이겐 상황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다. 무네코는 막부의 의향에 따라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독자적인 정치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겐로쿠 10년(1697년), 막부는 무네코를 여원에 준하는 대우를 하기로 결정했다.[5]

하지만 겐로쿠 12년(1699년) 5월, 무네코와 그녀의 측근들이 히가시야마 천황을 몰아내고 다른 황족을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무네코의 어머니 히가시니조노쓰보네와 측근 나카미카도 스케히로가 에도 막부의 명령으로 처벌받으면서, 무네코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7] 히가시야마 천황과 고노에 모토히로 등이 막부에 무네코의 전횡을 호소한 것이 몰락의 주요 원인으로 추정된다.

히가시야마 천황이 붕어한 후, 쇼토쿠 원년(1711년) 10월 17일, 무네코는 55세의 나이로 출가했다. 이는 정치적 발언권이 약해진 것과 더불어, 히가시야마 상황과 교고쿠노미야 아야히토 친왕이 잇따라 사망한 것에 대한 정신적 충격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그해 12월 23일 무네코를 여원으로 삼았으나, 출가 후 법호인 게이호인(敬法院)을 그대로 여원호로 사용하는 등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8]

2. 4. 출가와 죽음

나카미카도 스케히로 실각 후 정치적 발언력이 저하되고, 히가시야마 상황과 쿄고쿠노미야가 잇따라 병사하면서 정신적 타격을 받은 마쓰노키 무네코는 쇼토쿠 원년 10월 17일(1711년 11월 26일)에 센도고쇼를 떠나 55세의 나이로 출가했다.[8] 조정에서는 12월 23일(1712년 1월 19일)에 무네코를 여원으로 삼았으나, 출가 후 법호인 케이호인(敬法院)을 그대로 여원호로 사용하는 등, 이전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8]

교호 17년 (1732년) 8월 30일, 무네코는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 카미쿄구 쇼죠켄인에 있다.

3. 후손

황녀 후쿠코 내친왕은 쿠니나가 친왕(후시미노미야)과의 사이에서 사다타케 친왕을 낳았고, 사다타케 친왕의 증손자(무네코의 내손)에 해당하는 쿠니이에 친왕이 구황족 11궁가의 모든 공통 조상이 되었다.[8] 따라서 무네코는 나루히토의 현 황실(황자 히가시야마 천황의 자손)과 구황족 11궁가의 여계를 포함한 최근 공통 조상이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近世の朝廷運営 ―朝幕関係の展開― 岩田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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